쏟아지는 콘텐츠 속 광고인의 네오포비아
2024.04.26 11:08 광고계동향, 조회수:388
글 ·그림 임태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제일기획

네오 필리아
네오필리아 (neophilia)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욕구’라는 뜻이죠.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를 돌아가도록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심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것을 취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을 자극하여 소비를 만들어내는 기업들.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전선에 있는 광고인들 역시 늘 새로운 것을 강요받습니다. 못 봤던이미지를 가져와라, 새로운 미디어와 신선한 모델을 제안해 달라… 덕분에 광고인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하죠. 요즘 뜨는 힙한 동네도 가보고, 새로운 미디어와 브랜드를 찾아보고, 따끈따끈한 콘텐츠들을 남들보다 먼저 소비하고 관찰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뭐 나름 괜찮은 직장생활입니다. 얼리어댑터적인 삶이죠. 돈이 좀 들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회사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어도, 자료조사차 여기저기 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름 즐거운 일이죠. 근데 이게 시간이 좀 지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슬슬 숙제처럼 다가오거든요.


쏟아지는 콘텐츠들
OTT의 등장 이후 많은 양의 콘텐츠들이 쏟아집니다, 정말 엄청난 물량이죠. 영화와 드라마들이 쉴 새 없이 론칭됩니다. 시리즈물 하나 나오면 보통 8부작, 12부작 정도 되니 정주행 하는데 최소 10시간은 걸리는 거죠. 시작하기가 두렵습니다. 게다가 마블처럼 세계관을 이해해야 되는 경우는 새로 나온 영화 한 편 보려고 열댓 편은 봐야 하는 수고를 동반하죠.
여하튼 볼만한 게 하나 나오면 일단 관심 콘텐츠로 찜 해놓습니다. “좀 한가해지면 봐야지.” 그렇게 묵혀 두면 금방 새로운 게 또 나오죠, “앗 이것도 봐야지.” 봐야 할 것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처음 골라놨던 콘텐츠는 점점 낡은 것이 됩니다. 왠지 안 보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트렌드를 못 읽는 것 같아서 미루다 미루다 결국 유튜브 요약본으로 때웁니다. 밀린 방학숙제 마냥 봐야 할 콘텐츠들이 점점 쌓여갑니다. 스트레스죠. 

네오필리아와 반대되는 의미의 용어는 네오포비아(neophobia)라고 합니다. 새로운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네오필리아였던 광고인들은 네오포비아로 넘어갑니다. 

아니 뭐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까지 봐야 하나 싶겠지만 콘텐츠를 다루고 분석하는 일이 업의 기본이다 보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제작들의 경우 콘텐츠를 보면서 착안하는 인사이트들이 있어서 뭔가 계속 인풋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트렌드도 읽어야 하고.



결정장애가 만드는 네오포비아
솔직히 말하자면 볼 시간이 없다는 것도 핑계인 게 사실은 결정장애 문제가 더 큽니다.모처럼 시간이 남아 뭔가 하나 보고 싶어서 OTT를 켰다가도 이거 볼까, 저거 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케이블에서 천만번쯤 틀어준 ‘존윅’이나 보며 맥주를 따는. 늘 그런 식이죠. 콘텐츠의 홍수가 만들어낸 선택 장애입니다.

그렇게 선택으로 인한 피로감이 몰려올 때 저는 아주 예전에 봤던 것들을 다시 봅니다. 90년대 즈음 히트했던 영화들 위주로 카테고리를 좁혀서 보는 거죠. 짐 캐리의 ‘마스크’ 라든가, 레이더스를 필두로 한 ‘인디아나존스’ 3 부작 같은 영화들. 특히 그 시절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들을 보면 리프레시가 됩니다. 오우삼의 ‘페이스오프’ 라든지 ‘고공침투’, ‘더 락 ’뭐 이런 류의 9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 어차피 아는 내용이니 중간에 잠깐 딴 짓을 해도 좋고, 아 맞다 저 배우가 있었지, 저 음악이 있었지 하며 새록새록 생각나는 기억들도 좋고, 뭔가 푸근한 것이 아주 마음이 편합니다.

물론 지금 보면 그래픽도 어색하고 스토리 개연성도 엉망인 경우가 많습 
니다만 상대적으로 시간도 짧고 기승전결도 단순해서, 뭐랄까요 느끼하 
고 양 많은 음식만 계속 먹다가 깔끔한 분식으로 가볍게 때우는 그런 깔끔 
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가장 최근에 찾아본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콘에어’입니다. 1997년 작이죠. 무려 27년 전 영화랍니다. 캐릭터도, 스토리도 굉장히 심플하죠. 죄수 호송 비행기를 탈취한 나쁜 놈들과 의도치 않은 사고로 복역 중인 가석방을 앞둔 전직군인 캐서방. 아니 니콜라스케이지. 막 탈모가 시작된 그분의 진지한 연기를 보면 좀 웃기기도 하는데 나름 몰입감 있습니다. 게다가 조연들도 지금 보면 하나같이 유명한 사람들이고 액션장면도 나름 스케일감이 있죠. 편집이나 음향 쪽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오히려 요즘 영화보다 편집이 훨씬 직관적이고 기본기가 좋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열심히 만든 기운이 느껴진달까요.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날로그 전자제품을 보는 느낌 같아 좋습니다.

어쩌면 광고인의 네오포비아는 봐야 한다는 강박 같은 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나 저거 봤어” 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 정작 중요한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조금 여유를 가지고 콘텐츠를 즐기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끔 지쳤을 땐 뒤돌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넘쳐나는 콘텐츠에 지쳤다면 클래식한 블록버스터 한편 어떠실까요?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