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History] 단명으로 끝난 1920년대 초 어느 한국 광고대행사
2014.12.12 01:31 광고계동향, 조회수:37095


이름은 백영사(百榮社). 서울의 낙원동 256번지가 주소였다. 사업은 광고대리업(廣告代理業). 시대는 1921년. 어떤 일을 했을까?

자기 회사 광고가 3개 남아 있다<그림 1>. 그 내용을 보자.



광고를 내시기 전에 폐사에 하문(下問)하시면
가장 효과 있는 광고를 내실 수 있습니다.

경성 낙원동 256 광고대리업 백영사

문안 도안 작제 광고 서화 판각 목패 조각 간판
(文案圖案作製廣告書畵板刻木牌彫刻看板)
점식 회화 간판 동판 연판 제작 일반 광고 대리
(店飾繪?看板銅版鉛版製作一般廣告代理)

요새 말로 하자면 부티크일까. 그러나 마지막에 나와 있는 업무 내용에는 ‘일반 광고 대리’라고 해서 광고 전반 업무를 대행한 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취급 업무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제작 위주인 듯 싶은데 문안(=카피), 도안(=디자인), 광고 서화, 판각, 목패, 조각, 간판, 점포 장식, 회화, 동판, 연판 제작 등 전파 매체가 없던 당시로서는 간판을 포함해 광고 제작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한 셈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취급하는 업무 가운데 맨 처음에 문안과 도안을 넣은 것이다. 즉 카피와 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던 것이다.

1921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크기가 다른 7개 광고가 있는데 한경선(韓敬善) 양화점, 삼용방(蔘茸房)이라는 용과 인삼 상점, 의류 상점인 천일(天一)상회, 중앙이발관, 신광사(新光社)라는 책방 겸 문필구 상점, 그리고 해인옥이라는 양복점이다<그림 2>.



남은 빈 광고지면 일부에는 자기 회사 광고를 게재했다. 이 7개 광고는 틀림없이 백영사가 모두 제작, 대행한 광고들일 것인데 다른 광고보다 훨씬 눈에 뜨인다. 말하자면 크리에이티브가 돋보인다. 활자와 글만으로 만든 광고가 수두룩하던 1920년대에 비주얼이 주 된 광고임을 알 수 있고, 또 비주얼로 제품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있다. 광고카피도 창의성을 엮은 자욱이 나타난다.

의류도매상인 천일상회의 경우 우선 두 젊은이의 그림이 멋지다<그림 2-1>.



사입기도래(仕入期到來) 즉 사들일 때가 왔다는 말이다. 바디카피는 다음과 같다.(글은 일부 고쳤다.)

앞으로 심동(심한 겨울)이 되오며 신구세모(양력, 음력 신년)가 머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준비가 제일이오니 임갈굴정(臨渴掘井. 목말라 우물 팜)치 마시고 지금 차시(이 때)에 당상회 제품 사입 판매하시옵소서.

중앙이발관의 광고는 그 일러스트레이션이 업종을 곧 알 수 있게 하는데 카피 또한 설득력 있다<그림 2-2>.



흔치 않았을 전기이발기를 사용하여 위생적으로 이발을 하고 머리를 씻어 주며 단정하게 머리를 가다듬고, 또한 전기마사지로 안마를 해준다는 것이다. 꾸밈없는 스트레이트 카피이지만 남과 다른 점을 빠짐없이 담은 카피라는 데에 창의성이 나타난다.

전기 이발예입기(머리털을 자르는 이발기)를 사용하며 위생 생리적으로 조발과 세발을 하옵고 법에 의하여 안면과 두부를 단장하오며 탈모지 <신진구>를 사용하옵고 전기 응용 안마를 하여 드립니다.

책방이며 동시에 문방구 상점인 신광사(新光社)의 경우는 레이아웃이 독특한데 아래위로 나누어 두 업종, 즉 책과 문방구를 나타냈다<그림 2-3>.



눈길을 끄는 것은 한문 글자 넉 자로 된 헤드라인이다. ‘만종서적(萬種書籍)’인데 물론 만종이란 만 가지라는 뜻이지만 많다는 의미이다. 한문 글자 넉자로 문장을 만든 헤드라인인 셈이다.

백영사가 제작한 광고는 이 밖에도 상당히 있으나 영업을 시작한 지 1년을 넘기고 1922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사정에 의하여 백영사를 폐업하고 이에 근고하나이다”라는 간단한 폐업 인사를 끝으로 사라졌다<그림 3>.



폐업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아쉬운 일은 3·1 독립운동의 피 흘린 대가로 얻은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철폐 및 문화정치 시작으로 192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한 뒤에 곧 개업한 한국인 경영 광고대행사가 사라진 일이다. 틀림없는 사실은 백영사가 광고의 선각자였다는 것이다. 그 뒤 다시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광고대행사는 없었고 한국 광고시장은 일본 덴츠가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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