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광고 이야기] 내 삶을 두 배로 만들어 준 그들이 있기에… "뤼얼리?"
2013.10.29 11:11 CHEIL WORLDWIDE, 조회수:7333



매주, 매일, 어쩌면 매 시간 쉬지 않고 영화를 보고, 극장을 회사처럼 출근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고백하건데 어린 시절 나를 키웠던 건 영화가 아니라 8할이 TV 드라마였다. 그건 모두 아버지 탓이었다. ‘비디오 스타가 라디오 스타를 죽이는’ 시대가 오기 직전 나름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는 ‘한국에도 베타 비디오의 시대가 온다’라고 굳게 확신하셨다. 그리고 일본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포부도 당당하게 베타 비디오 플레이어가 들려 있었다. 말하자면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불행히도 아버지의 예상(혹은 소원)과는 달리 한국의 보급형 비디오는 VHS 방식으로 결정됐다. 80년대 후반 동네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비디오 가게에 가서 결국 우리 삼남매가 빌려 올 수 있는 영화 비디오는 하나도 없었다. 친구들이 홍금보와 성룡의 깨알 같은 액션에 대한 수다를 떨고, 주윤발과 적룡의 폼 나는 우정을 말할 때 나는 공중파에서 방송되는 드라마를 녹화해서 보고 또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 쓸모없는 기계의 최대이자 최고의 기능이었다.

김혜수와 이혜숙이 자매로 나오던 일일드라마 <세노야>를 매일 시간 맞춰 예약해서 보고 또 봤고, 김희애와 손창민의 안타까운 사랑을 담은 <겨울 나그네>는 거의 40번쯤 ‘정주행’과 ‘역주행’을 반복했다. 어떤 드라마들은 장면의 시작만 봐도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였다.

특별할 것 없이 순탄했던 성장기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맛본 것도 모두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어른들의 연애와 사랑의 순환을 목도했고, 대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경험했다. 어렴풋이 사회의 이면을 엿보았던 것도 같다.

그 이후로도 영화 보기를 직업으로 가지기 이전까지 나의 삶에서 드라마는 영화만큼이나 중요한 무엇이었다. 나의 친구는 <올인>이나 <아이리스> 같은 으리으리한 블록버스터 대작보다는 김수현이나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혹은 밥을 먹고 치우고 설거지 하는 것으로 20분쯤 잡아먹는 일일드라마였다. 드라마 속 사람들은 ‘배우’라는 직업을 떠나 언제나 거기에서 함께 있어 줄 것 같은 ‘가족’이었다. 엄마이자 아빠였고, 삼촌이자 고모였고, 오빠이자 동생이었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건 김희애와 손창민이 아니라 <겨울 나그네>의 순수한 연인 다혜와 민우였고, <꽃보다 아름다워>의 고두심이 아니라 답답하게 미련하지만 꽃보다 아름다운 엄마 ‘영자 씨’였을 것이다.

그래서 올레 광고 속 한진희가 “데이터가 2배”라고 말하는 순간 이혜숙이 “뤼얼리?”라고 물을 때 그건 데뷔 40년이 넘은 중견 배우 한진희와 이혜숙의 대화가 아니라<금 나와라 뚝딱>에서 티격태격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던 순상과 덕희의 한때로 보인다.

이보영이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이종석과 같은 대화를 반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또 다른 세상 속에서 허당기 가득한 혜성이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수하에게서 얻는 귀여운 깨달음의 탄식이었던 것이다.

오늘도 광고 속에서 수많은 스타들이 밥솥을 사서 나와 함께 밥을 먹자고, 기적의 화장품을 바르고 20년 어려 보이게 살아보라고, 깃털보다 가벼운 등산화를 신고 에베레스트라도 오르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타들이 권하는 상품들보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권할 때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건 마치 <전원일기>의 양촌리 첫째 며느리가 국물 맛이 끝내 준다고, 좀 맛보라고 숟가락을 들이밀 때 자동적으로 침이 꿀떡 넘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매일, 매주 함께 살아가는 주변의 가족과 이웃, 친구와 연인이 건네는 권유 앞에서는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유혹에 빠져드는 것이다. 뤼얼리? 리얼리!







영화 저널리스트_백은하
<씨네21> 기자로 일했으며 <매거진T> <10아시아> 편집장을 지냈다. 특히 배우들에 관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에 대한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는 '배우 전문 기자'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 시대 한 56국 배우>, <안녕 뉴욕>, <배우의 얼굴 24시>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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