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Creative] 어려운 놈. 불편한 놈. 여운이 남는 놈.
2013.04.30 11:57 광고계동향, 조회수:6870


15초 안에 딱 보면 누구나 아는 크리에이티브를 20년 가까이 요구 받아 온 광고인으로서 다소 한풀이 같은 글일 수 있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광고 만드는 사람이 원칙적으로는 지양해야 마땅할 어렵고 불편한 아이디어가 주는 여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하게 하는 크리에이티브 말입니다.
 
작년 그러니까 2012년도 깐느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비롯 다수의 골드를 휩쓴, 그에 비해 글로는 많이 다뤄지지 않은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The Whole Picture 캠페인-
 
캠페인 개요는 이렇습니다. 온라인 미디어로 전향한 가디언지의 ‘오픈 저널리즘’ 추구 의지를 소구한 광고캠페인으로, TVC를 포함, 유튜브,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확산시킨 2분 10초짜리 동영상 “아기돼지삼형제(Three little pigs advert)”와 그와 관련된 미디어 통합적인(전방위라고도 말하는) 인터랙티브 광고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서 이 캠페인이 글로 많이 다뤄지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좋고 새롭고 짚어 볼만한 시도인데 역시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가 어렵군요.
 
동화 아기돼지삼형제를 각색하여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영국 드라마를 탄생시켰습니다. 발단은아기돼지삼형제의 집에서 끓는 물에 빠져 죽은 늑대로부터 시작됩니다. 늑대의 보험금을 노린 살인범으로 지목된 아기돼지들, 선량한 아기돼지를 변호하는 의견들과 그 반박논리들, 엎치락뒤치락 범죄 이유의 추적 끝에 나오는 모기지 제도의 문제점과 사회적 이슈 제기까지!
 

미디어와 독자가 협업을 통해 결말에 다다르는 과정을 담은 이 동영상은 2006년부터 디지털 퍼스트를 내세우며 오픈 저널리즘을 강조해 온 가디언의 철학을 순식간에 체험하게 하는 놀라운 크리에이티브였습니다.
 
어느 나라의 것이든 모름지기 동화란 코흘리개 아이들도 금세 알 수 있도록 권선징악이 뚜렷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세상의 사건 사고들이란 어떻습니까, 대부분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사안들이지요. 동화 아기돼지삼형제가 어른드라마로 각색되면서 진실처럼 믿고 있던 결론이 오픈된 참여와 관심을 통해 시시각각 재조명되며 우리는 전혀 다른 big picture를 볼 수 있었지요. 이는 25년 전 종이신문 시절 가디언이 만든 TVC “Point of View”와 비교해 볼 때 같은 주제임에도 크리에이티브면에서는 훨씬 더 기발하고 흥미진진하며 복잡한 쌍방향적인 캠페인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TVC가 결론내지 않고 시청자 각자 생각하게 하는 힘. 온 오프라인을 아우르는 파급력 또한 단순하지 않았고 그 파장은 컸습니다. 물론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놈입니다만 말입니다.

두 번째 소개할 크리에이티브는 ALS Foundation(루게릭병 재단) Netherlands의 “I have already died”캠페인입니다. 추측하건대 어쩌면 이 아이디어도 최초엔 동화적인 발상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떠난 하늘나라 천사가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러나 이 크리에이티브는 너무나 리얼해서 충격적이고 메시지의 진솔함을 넘어 마음이 불편하고 그래서 외면할 수 없는, 한 번을 스치듯 보아도 기억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캠페인 개요는 이렇습니다. 루게릭병은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김명민씨가 연기했던) 근육이 점차 굳어져 종국엔 호흡하는 근육까지 마비되어 사망하는 희귀병입니다. 희귀하기는 하나이 병에 걸린 환자는 통계적으로 3년 안에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지요. 그러나 아직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하여 연구 기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있고 이에 네덜란드 루게릭병 재단은 다소 충격적인 아이디어를 기획합니다. 2년 전(이 캠페인이 깐느 그랑프리를 받은 건 2012년, 작년이니까 2009년 또는 2010년이겠네요) 루게릭병에 걸린 8명의 환자들에게 모델로 출연해 줄 것을 부탁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사랑하는 친구, 가족과 함께 루게릭병에 관심을 가지고 기부를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고를 촬영합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이 광고는 촬영하고 난 뒤 약 2년이 지나 집행됩니다. 광고의 모델이 되어준 루게릭병 환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에 광고가 온에어된 것이지요. “부디 ALS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ALS재단을 후원해주세요 저를 위한 게 아닙니다. 저는 이미 죽었거든요”라고 광고에 나온 환자들이 얼굴 근육이 경직된 불편한 표정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불편한 표정이 고스란히 보는 사람의 마음에 불편한 죄책감으로 다가옵니다. 이 광고 집행 후 유가족 인터뷰 등 각종 매체로부터의 관심이 쏟아졌음은 물론 이 캠페인의 실질적인 효과로 루게릭병에 대한 인지도와 기부의향은 약 20%씩 상승했고 모금액 또한 500% 증가했다고 합니다.
 
저는 깐느 수상작 리뷰에서 딱 한번 이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억에 남았습니다. 마음이 몹시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쉽고, 편한 광고가 갖는 한계에 대해서.
요즘처럼 소비자가 주입식을 극도로 거부하는 시대를 살면서 쉽고 편한 광고가 여전히 미덕일까? 15초 안에 믿게 만드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 소비자들의 의심, 검색, 댓글을 유발시키지 못한 심플한 크리에이티브가 과연 좋은 걸까?
 
저는 가디언처럼 한마디로 설명할 수도 없고 반응도 다각적인 어려운 놈, ALS재단처럼 곱씹어 볼수록 실현 불가능해 보이고 오래도록 마음 불편한 놈이 주는 영향력에 대해 점수를 주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것이 주는 여운에 대해, 그 여운이 남기는 높은 브랜드인지도와 광고효과에 주목하겠습니다. 러닝타임의 길고 짧음이 아닌 아이데이션 단계에서의 길고 깊음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사실 어려운 놈은 쉽지 않지만 흥미로운 놈이었고, 불편한 놈은 편치 않지만 몹시 신경 쓰이는 놈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의 이런 주장이 어렵고 불편하신가요? 그러나 세계적인 권위의 깐느도 이미 그랑프리로 동의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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